본문 바로가기
diegobaseball
칼럼-베이스볼인플레이

초구 승부의 '미학'? 2016.4.21

by 토아일당 2017. 10. 18.

*** 일간스포츠 연재했던 칼럼 [베이스볼인플레이] - 2016년 4월 21일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218352#articletitle



‘피칭 마스터’ 그렉 매덕스가 남겼다는 명언 중 이런 게 있다고 한다. 


“내가 가진 최고의 승부구는 초구 스트라이크다.” 


그는 통산 355승(역대8위) 3371탈삼진(역대10위) 최초의 4연속 사이영상, 유일한 17년 연속 15승 같은 업적을 남겼다.


초구 스트라이크는 투수 최고의 무기일 수도 있다. KBO리그 2010~2015시즌에서 첫 번째 카운트가 스트라이크였을 때 타율은 0.244다. 지난해 이보다 낮은 피안타율을 기록한 투수는 2명 뿐이었다. 초구 볼이라면 0.284로 올라간다. 지난해 리그평균보다 높다. 보통 이하의 투수가 리그 최고의 투수로 변신할 수 있다면, 초구 스트라이크는 최고의 무기라 불려도 이상할게 없다. 


하지만 타자에게도 기회가 있다. 분석기간 중 리그 평균 타율은 0,272였지만 초구타격시에는 0.348이다. 타고시즌이었던 작년에도 0.348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타자는 2명 뿐이다. 야구의 묘미다. 그래서 '초구 승부의 미학'이라는 표현은 어색하지 않다. 


야구는 팀 스포츠지만 매 순간 투수와 타자가 1대1 승부를 겨루는 경기이다. 그래서 승부에 관한 클리세도 많다. 팬들은 잘 치고 잘 던지는 스포츠를 넘어, 두뇌와 두뇌, 심장과 심장이 맞서는 멘탈 승부가 야구 안에 있다고 믿는다. 


초구승부에 관해서는 낭만적 클리세 뿐 아니라 냉정한 통계분석조차 그 중요성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을 믿고 '칠테면 쳐 봐라'며 존 안에 공을 때려넣는 투수들은 뜨거운 전사의 심장 뿐 아니라 냉정한 승부사의 두뇌마저 가졌다고 봐야 할까.



초구 스트라이크 여부에 따라 타석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지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1-1 카운트에서 3구째가 볼이 되면 이후 타율은 0.355다. 스트라이크가 되면 0.197로 하락한다. 초구의 공 한개보다 휠씬 큰 차이다. 


머니볼 신화의 주역 중 하나인 폴 디포데스타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1-1 카운트다. 볼카운트 2-1에서 모든 타자는 올스타급이 되고, 1-2에서 타자는 누구라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형편없는 타자가 된다.”


공 하나가 스트라이크냐 볼이냐에 따라 타석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져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초구는 가장 '덜' 중요하다. 각각의 볼카운트 공 하나가 초래하는 차이가 모두 초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타자의 초구공략은 어떨까? 초구 타율은 물론 높지만 1-1에서의 타율도 비슷하게 높다. 1-0 나 2-1에서는 더 높고 3-1에서는 더더 높다. 높은 초구 타율의 본질은 타율 계산 방법에서 생기는 통계적 착시에 가깝다.


타율 계산에서 분모는 타격한 횟수(희생타 제외)와 삼진 아웃된 횟수의 합계다. 그런데 초구타격에는 삼진 아웃이 없다. 삼진 아웃을 뺀 타율은 평균 타율보다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허용한 1-0의 타율조차 초구 타율과 별 차이가 없다. 투 스트라이크 이전의 타율은 거의 다 비슷하게 높다. 초구타율이 높은 것은 2스트라이크 전에는 삼진을 당할 수 없는 야구규칙 덕분이다. 


중요한 것은 초구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더 많은' 스트라이크다. 초구 승부를 둘러싼 결과가 극적으로 갈린 이유는 그것이 '초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렉 매덕스처럼 좋은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고 하면 될까? 흔하디 흔한 '쫄보' 투수들에게 초구든 아니든, 일단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면 될까?


그런데, 지난 6년 동안 KBO리그에서 패스트볼 구속이 시속 140km이하일 때는 헛스윙비율이 4.5%였고, 시속 150km이상일 때는 12.2% 였다. 그렇다면 삼진 하나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 시속 10km 쯤 더 빠른 공을 던지라고 권하는 것은 어떨까?


좋은 투수는 더 많은 스트라이크를 던진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좋은 투수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애당초 좋은 투수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더 빠른 구속, 더 정교한 제구, 더 예리한 무브먼트를 가쳤기 때문에 많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초구 타율이 유독 높은 타자의 정체는 뭘까. 전략적 노림수의 결과일까? 그보다는 헛스윙하지 않고 배트에 공을 맞춰 그라운드 안에 보내는 콘택트 능력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초구 타율은 대체로 인플레이 타구의 평균타율(BABIP)과 비슷해진다.


야구는 멈춤이 있는 경기다. 멈춤은 다양한 승부의 갈림길이고, 그래서 야구는 전략게임이다. 승부를 앞둔 그 멈춤의 순간, 선수는 근육보다 정신의 지배를 더 받을 것이다. 그래서 야구는 분명 멘탈 게임이다.



야구가 가진 고유한 매력이 여기서 온다. 하지만 승부와 멘탈에 관한 왜곡된 팬터지도 있다. 어떤 팬터지는 플레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초구 스트라아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는 심장이 약해서가 아니다.


'초구의 미학'이란 그저 부적절한 팬터지와 잘못된 데이터가 합작해 만든 허상일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야구에는 '멈춤'이 있고, 동시에 '초기화'가 있다. 스코어는 이어지지만, 이닝이 바뀌면 아웃카운트도 주자도 초기화되어 다시 시작한다. 


타석이 바뀌면 볼카운트가 초기화되어 새로운 승부로 넘어간다. 돌이키지 못할 실수와 후회가 남았다 해도 승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나간 결과를 뒤로 하고 새로운 승부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용기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축복이다. 볼카운트에 따라 타석결과가 어찌어찌 달라진다는 데이터 없이도 초구 승부의 미학은 충분히 숭고하다.


글머리에 소개한 매덕스의 명언을 검색해봤다. 며칠을 뒤졌지만 어떤 영문 페이지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승부에 관한 팬터지란 원래 그런 게 아닐까. 거짓말처럼 절묘하게 무언가를 상징하지만, 실은 거짓말일 수 있는 명언 같은 것. 하지만 거짓이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그저 그것이 주는 울림이 중요한 것. 


#매덕스 #베이스볼인플레이 #세이버메트릭스 #초구승부 #토아일당